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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살아이황산테러사건(정말슬프고화나는이야기)[0] 팽귄2 13-08-19 855

김태완군 어머니가 쓴

49일간의 병상일지


황산테러로 숨진 “태완아 잘 가, 먼 훗날 다시 만나면 더 많이 사랑해줄게”



99년 5월20일, 대구에서 한 어린이가 황산테러를 당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피해자 고 김태완군(6)은 생존확률 5%라는 극한 상황에서도 놀라울 정도의 강한 정신력으로 49일 동안 생명을 이어나가 온 국민을 안타까움과 분노에 떨게 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사건 발생 2년이 지나도록 범인이 잡히지 않고 미궁에 빠진 상태. 어머니 박정숙씨가 다시는 태완군과 같은 희생자가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작년 11월부터 올 2월15일까지 19차례에 걸쳐 인터넷에 ‘49일간의 아름다운 시간’이라는 태완이의 병상일지를 올렸다.  


박씨가 쓴 가슴 아픈, 그러나 아름다운 기억들을 정리했다.  


2000년 11월24일


눈을 감는다. 그 애의 모습이 눈에 박힌다. 너무나 의연했던 내 아이 태완이…. 아이 흔적이 조금씩 사라져간다. 5백원짜리 조립품으로 열 손가락을 꼼지락꼼지락 움직여 로봇을 만들곤 씨~익 웃어 보이던 아이, 길을 걸을 때도 잠을 잘 때도 항상 묻어나던 그 아이의 내음새…. 어제의 그 길은 그냥 그 자리에 있는데, 그 아이만 없다.



태완이의 해맑은 꿈을 훔쳐간 그는 이 세상에서 아무렇지 않은 웃음을 흘리며 살아가고 있는데. 이 세상엔 진실로 죄에 대한 하늘의 징벌은 없는 건가? 죄에 대한 벌은 어떤 형식으로든 받는다고 믿어왔었다.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닌가보다.



억울함보다는 어린 내 아이, 그 영혼에 대한 죄스러움이 밀려온다. 나쁜 사람 잡아 꼭 사과하게 해주겠다던 마지막 그 약속을 지켜주지 못한 무능력한 부모의 마음에 고개를 들 수가 없다.



길을 걸으며 언제나 웃음을 띤다. 하늘 저편에서 태완이가 엄마를 보고 있을 것만 같아 우울한 얼굴을 할 수가 없다. 그 애는 웃고 있는데 엄마인 나는 바보처럼 울고 있다면 얼마나 외로울까. 혼자 있는 것만도 두려울 텐데.



마지막 죽음을 향해 가던 태완이는 너무나 고요했다. 남은 가족의 슬픔을 가벼이 덜어주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그 깜깜한 어둠 속에서 아빠의 손을 꼭 잡아 자식을 눈앞에서 보내야 하는 우리의 두려움을 없애주었다.



아빠가 말했었다. “태완아, 아빠가 나쁜 사람 잡아서 꼭 혼내줄게.”



엄마가 말했었다. “태완아 나쁜 그 사람, 꼭 태완이한테 사과하게 해줄게.”



태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힘겨운 숨쉬기가 끝나려 할 때, 의사들의 심장 소생술이 몇 차례 이어졌다. 가여운 그 조그만 가슴이 사정없이 짓눌렸다.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아이의 몸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아이의 얼굴과 몸은 점점 붉은빛으로 물들어간다. 혈액이 응고되지 않아 마치 분수처럼 솟구쳤다. 심장을 누를 때마다 기다린 듯 피는 아이를 물들게 하고…. 그 붉은빛은 무서우리만큼 고왔다.



아빠는 힘겹게 의사분의 손을 당기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더 이상의 고통은 주고 싶지 않았다. 아빠의 두 눈엔 빗줄기 같은 굵은 눈물이 소리 없이 뚝뚝 흐른다.



엄마는 태완이의 귓가에 작게, 아주 작게 속삭인다.



“태완아, 마음 편히 잘가. 엄마도, 아빠도, 형아도 조금 있다 니가 간 곳으로 갈게.”



“….”



“태완아, 그곳은 마음의 눈으로 보면 된단다. 무서워하지 마, 무서워하지 마. 우리 태완이 먼저 가 있어. 나중에 다시 만나자. 잘 가, 잘 가, 잘 가….”



짧은 작별 인사를 나눴다. 아이는 그 말을 마치자 기다린 듯 고르게 고르게 숨을 거두어갔다. 살아 있음이 그 아이에게도 고통일 것 같았던 엄마 아빠의 마음을 그 애는 알까?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기를 간절히 기도한 마음을 그 애는 알까?



마지막 가는 길. 태완이는 그렇게 사랑하는 아빠, 엄마, 형아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채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49일을 그렇게 있다 홀연히 떠나갔다. 누구의 잘못이든 그 아이가 견디기엔 너무나 힘겨운 고통이었다.



세월이 가면 모두들 잊혀지겠지. 그런 아이가 있었는지, 그렇게 힘겨운 시간을 보냈었는지…. 이 세상 다하는 그날 아이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할까? 태완인 그냥 잊혀진 아이가 되고 마는 걸까? 억울한 죽음만을 간직한 채.



2000년 11월27일


5월20일 아침. 그날 일은 떠올리기조차 두렵다. 가슴에 쏴아아~ 찬바람이 밀려온다.



엄마는 잠자리에 있는 아이를 깨웠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학습지 공부를 보내기 위해. 아이는 새벽에 퇴근해 잠든 아빠의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멍하니 앉아있다. 뭘 생각한 걸까? 밥을 먹지 않겠다고 해 라면을 끓여 엄마랑 나눠 먹었다. 마지막 아침을.



아이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옆에 있던 이모가 “우리 태완이 아니냐”고 한다. “아니야.” 엄마는 자기 아이가 아닐 거라 말한다. 공부방에 거의 다 갔을 시간인데.



 한 번의 비명이 들렸다. 고통스러운 목소리. 다시 이모가 “저거 태완이 아니가” 한다. 무엇엔가 홀린 듯 뛰쳐나갔다. 웬 아이가 전봇대에 기대 주저앉아 있다.



‘내 아이 아니야, 아니야!’



머리와 눈썹이 그을린 듯 희미하게 이상히 말라붙어 있다. 가스불에 잔털이 타면 저 모습이리라. 들여다봤다. 내 아이 태완인 아닌데, 아침에 곱게 입혀 보낸 하얀 옷 한 벌이 반쯤 없어진 형태로 아이의 몸에 남아 있다. 저 하얀 옷은 우리 태완이 옷이 분명한데….



집에서 나가 엄마 눈에서 벗어난 지 10여분 동안에 벌어진 일이다. 몸서리쳐진다. “태완아!” 하고 부르니 “뜨겁다”고 했다. 누군가의 도움을 청하기 위해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남자를 찾았다. 매일 보이던 사람들이 그날 그 시간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 훼엥한 골목길의 그날 그 느낌….



그날의 해님은 유난히 맑게 빛났지만, 우리 가슴엔 그때부터 영원히 밝아지지 않을 암흑이 드리워졌다.



그렇게 아이는 병원에 옮겨졌다. 약품을 뒤집어썼다고 외쳤다. 응급처치는 물로 씻어내는 거였다. 떨고 서 있는 엄마를 누군가 밖으로 내보낸다. 아이 곁에 못 가게 한다.



병원 응급실 밖 바닥을 손으로 긁으며 엄마는 짐승의 소리처럼 울부짖고 있었다. 누군가 옆에서 이렇게 내뱉는다. “강한 분이 왜 이러십니까.” 무엇이 강하단 말일까.



얼마의 시간이 흘렀다. 엄마는 “내가 엄만데, 엄마가 옆에 있어야 해.” 허우적거리며 아이에게 갔다. 아이는 온몸이 퉁퉁 부어오른 채 엄마 앞에 누워 있다.



엄마가 보고 싶어서일까? 아이의 눈이 반쯤 떠 있다. 그런데 눈동자의 움직임이 없다. “태완아! 태완아!” 목메게 부르니 아이가 고개를 움직인다. 가여운 우리 태완이의 49일간 병원생활은 감지 못한 눈으로 그렇게 시작되었다.




2000년 11월29일


처음 간 병원에선 ‘힘들다’ 했나보다. 언니랑 아이 아빠, 할머니 모두들 더 큰 병원으로 옮기려 한다. 화상병동이 있는 곳이 있단다. ‘화상병동은 왜 필요한가?’ 엄마는 그것조차 알지 못했다.



앰뷸런스에 호흡기를 댄 태완이가 탔다. 엄마는 그 차에 올라 아이를 바라보며 멍했다.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아이를 잡고 “태완아! 태완아!” 불렀다. 가슴이 방망이질친다. 경북대 병원 가는 길은 너무나 멀게만 느껴졌다.



기도가 막히는 걸 막기 위해 입안에 인공호흡기를 대고 무언가 장치를 하고는 아이를 약을 먹여 재웠다.



아이의 몸은 점점 검게 물든다. 끊임없이 부어오른다. 눈은 여전히 세상을 향해 뜨고 있다. 감지 못하고.



오늘밤이 지나봐야 한단다. ‘고비?’ 이 말이 무슨 말인가?



저녁 10시쯤 아이는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정신을 차리라고 옆에서 끊임없이 말을 했다. 아무 생각이 나질 않는다.



한밤에 언니를 앞세워 사고 현장으로 가야 했다. 새벽이 뿌옇게 밀려들 즈음 언니와 물 담은 양동이를 들고 골목을 헤맸다. 그 황산이라는 무서운 약품이 물에 묘한 반응을 보였다. 꺼멓게 있던 그 물질은 물이 닿으면 뿌옇게 변해버린다.



아이가 고통으로 헤맨 그 골목을 기었다. 땅바닥에 있는 이상한 모든 것에 입을 대어봤다. 시큼한 그 맛을 확인하기 위해, 그 범인의 행적을 찾기 위해.



약품이 골목 어귀에서 사라졌다. 아이가 누군가를 봤다는 그 입구에서. 일의 모든 실마리가 되는 곳이다. 미친듯이 온 동네를 뒤졌다. 쓰레기통도 뒤졌다. 하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황산의 흔적은. 골목의 그곳 외엔.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2000년 12월1일


중환자실 복도에 기대어 서 있었다. 아빠는 엄마에게 마음 굳게 먹으라고 했다. 둘 다 말을 잊은 듯하다. 아빠는 내내 말이 없다. 온 하루가 그렇게 간다.



아무런 말 없이 멍하게 있던 아이 아빠가 고통에 찬 짐승처럼 울부짖는다. 그리곤 실신을 했다. 언니가 어디서 구했는지 바늘로 아빠의 손가락 끝에서 피를 냈다. “김서방, 정신 바짝 차려야 해” 한다. 아빠는 무릎에 얼굴을 묻고는 어억어억 소리를 낸다.



엄마는 아무런 표정 없이 아빠를 바라만 봤다. 다른 세상의 일 같다고만 생각되었다. 소리 없는 움직임으로 의료진만 중환자실을 드나들었다. 속이 불이 난 것만 같다.



아이의 담당의사만 보이면 뛰어갔다.



“아이는 어때요?” 표정이 없다.



“잘 견디고 있나요?”



“네, 잘 견딥니다.” 애써 웃어 보인다.



“우리 태완이 잘 견디죠?” 왜 쓴웃음이 날까?



하루 두 번의 치료, 두 번의 면회. 치료가 끝나면 면회를 한다. 그 시간을 위해 온 하루를 서 있다. 중환자실 유리문에 귀를 대고, 무엇이든 내 아이의 소리는 들어야겠기에.



아이의 온몸이 까맣다. 얼굴, 가슴, 배, 등, 두 팔, 두 다리, 두 손…. 손끝, 발끝만이 내 아이의 살결이다. 꼼지락거린다.



체내산소율을 알기 위해 발톱 끝에 반창고 같은 걸 붙여두었다. 그게 찝찝한지 다른 쪽 발끝으로 자꾸만 밀어낸다. 그 모습이 눈물나게 귀엽다.



중환자실에선 의식이 없을 거라 했었다. 하지만 아이는 엄마의 목소리에 반응을 보였다. 끄트막에 조금 남은 아이 살결을 뺨에 갖다 대본다. 따스하다. ‘우리 아이 살결인가?’



그 작은 손을 잡고 “태완아, 엄마야” 하고 불러본다. 가늘게 떨리는 손끝으로 엄마 손을 잡으려 한다. 오므리지도 못하는 그 손끝으로. 아이가 “어… 엄마” 하고 부른다. 가늘게 떨리는 여린 목소리. 입안이 굳어 혀끝만 겨우 움직이며 바보 같은 엄마를, 작은 아이를 지켜주지 못한 바보 엄마를 부른다. 가슴이 떨렸다. ‘엄마’라는 그 소리가 그렇게 가슴을 떨리게 하는 소리였는지 예전엔 미처 알지 못했다.



치료가 끝나고 작은 몸을 붕대로 감으니 아이가 몸집이 큰 아이로 변한다. 꺼멓게 부어오른 얼굴이 너무 가여워, 움직이지 않는 두 눈이 너무 가슴 아파 얼굴을 좀 가려달라고 했다. 그러자 아이는 “아빠나 이모가 오면 엄마가 얼굴을 좀 가려주세요” 한다. 그 소리에 아이는 마음이 상했나보다. 아무도 만나지 않는단다. 세상에서 1등으로 좋아하는 아빠도, 2등으로 좋아하는 이모도, 보고 싶은 형아도.



아침 면회가 끝나면 다음 치료가 있는 오후까지 기다려야 한다. “태완아, 엄마 화장실 갔다 올게” 한다. 그 시간이 너무나 길었다.



2∼3일 지나자 아이의 안정을 고려해 중환자실에 계속 머물게 해주었다. 아이의 몸에서 시커먼 변이 밀려나왔다. 놀란 마음에 “저게 뭐예요? 왜 저래요?” 소리쳤다. 아이는 누워서 변을 본 게 창피한지 엄마가 닦아준다니까 거부의 몸짓을 했다. 당황하며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미안. 근데 병원에선 다 이렇게 한대. 딴 사람도 다 누워서 그렇게 해. 엄마가 몰라서 그랬어. 미안해” 하고 달래듯 말을 하니 그제서야 몸을 돌려 제 몸을 닦게 해준다.



나에게 처해진 이 현실을 벗어버리고 싶다. 꿈이길, 꿈이길. 이 아인 누군가, 지금이라도 집에 가면 예쁜 우리 태완이가 웃으며 “어디 갔다 오노” 하며 달려와 안길 것만 같은데.




2000년 12월5일


5월25일, 밤 10시 즈음에 중환자실에서 화상병동 일반 병실로 옮겼다. 최후의 상황을 준비하고 있으란다. 그게 무슨 말인가?



폐가 줄어드는 걸 막기 위해 중환자실에서부터 계속 등과 가슴을 두드려야 했다. 싫다 한다. 달래도 보고 화도 내본다.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인 듯. 엄마가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기에 그 일에만 매달렸다.



가래가 기도로 넘어가는 걸 막기 위해 흡입기로 계속 뽑아내니 가래와 피가 섞여 나온다. 굳어졌던 입안의 각질도 떨어져나와 병에 핏빛이 가득 찬다.



매시간 소변량을 기록하고, 체온을 재고, 끊임없이 가래를 뽑고, 등과 가슴을 두드리고. 어떻게 견뎠을까, 내 아이.



의사가 “의지가, 정신력이 굉장한 아입니다” 한다.



‘그래, 우리 태완이가 어떤 아이인데, 꼭 이겨낼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우리의 마음과는 달리 의사들은 그 어떤 기대의 말도 주지 않았다. 아이는 인공호흡기를 떼내고 혼자 호흡을 하고 있는데.



5월27일, 담당의사는 최후의 상황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저렇게 있다 어떻게 될지 모른단다. 패혈증이 오면 어떻게 할 수 없노라 한다. 호흡 곤란이 생기면 다시 인공호흡기로 바꿔야 하고 그러면 고통은….



아빠는 그 말에 “끝까지 최선을 다해주세요” 했다. 그 말 외엔 달리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나보다. 엄마는 옆에서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다. 그 ‘고비’라는 말과 ‘준비’라는 말의 의미를 엄마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병실로 돌아오는 발걸음엔 세상의 온 무게가 다 실렸다. 하지만 아이는 맑고 고운 목소리로 엄마와의 대화를 놓지 않고 있었다. 우린 태완이의 의지로 인해 희망을 잃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엄마는 작은 바람도 가졌다.



“우리 태완이 다 나으면 시골 들어가 살자. 쬐그만 절이 있는 시골에서 난 태완이 뒷바라지하며 소박하게 살거야. 태우 상처 안 입게 태우에겐 비밀로 하고 그렇게 그렇게 살거야. 태완인 부처님 잘 아니까 절에서 생활하고 난 그 아이 두 눈이 되어 살거야. 그럼 우리 태완인 영리해서 금방 지리 익히고, 세상의 어려움은 접하지 않아도 되고, 그러다 기회가 되면 안구 기증도 받고, 그러기 위해 우리 장기도 기증하자. 그러면 태완이 순서가 빨리 올지도 모르잖아?”



우린 태완이가 그렇게 견뎌주리라 생각했다.




2000년 12월9일


“엄마, 언제쯤 볼 수 있는데? 너무 깜깜하다.”



아이가 묻는다. 병원에 오고 처음으로 보이지 않는 눈에 대해 꺼낸 말이다.



“으응 태완아, 조금만 있음 다 나아. 그러면 우리 태완이 잘 볼 수 있어.”



“엄마, 그래도 답답하다.”



“태완아, 병원에 오면 전부 이렇게 불 끄고 깜깜하게 해놓고 있단다. 엄마 아빠도 깜깜하게 해놓고 있거든. 눈은 보이지 않아도 마음으로 보면 돼. 생각을 하면 다 볼 수 있단다.”



아이가 그 말뜻을 알아들었을까? 엄마의 아픈 마음을 알았을까? 아이는 말이 없다.



하루 두 번의 치료가 한 번으로 줄었다. 아빠와 엄마는 괴로워하는 아이의 고통을 줄이고 싶었다. 치료를 줄여달라고 부탁했다. 아이도 편안해했다.



6월 아침, 치료가 시작되었다. 아이 눈에 감긴 붕대를 떼는 순간 심장이 일순간에 멈춰버리는 것 같았다. 숨이 턱 막힌다. 붕대와 함께 떨어져나온 건 아이 눈에 있던 ‘각막의 조각’이었다.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던 처참한 모습이 눈앞에 놓여 있다. 우리의 작은 바람은 그렇게 나뭇가지 꺾이듯 꺾어지고 있었다. 그보다 더한 것이 기다린다는 것도 모른 채 엄마는 각막이 떨어져나간 아이의 두 눈을 두려움에 가슴 졸이며 지켜보고 있었다.



멍하니 서 있는 엄마를 두고 빠른 손놀림으로 치료를 끝낸 의사들이 조용히 나간다. 아이에게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다. 아빠가 시트를 바꾸고, 병실을 청소하고….



가슴이 아팠다. 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왔다. 가슴에 커다란 바위 하나 올려놓고 거기다 망치질해대는 것 같다. 숨이 막히고 앉지도 서지도 아무것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냥 이대로 ‘아이보다 먼저 죽는구나’ 가슴을 움켜쥐고 그 생각만 했다.




2000년 12월12일


아이가 깜깜하다고 한다.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할까. 엄마는 더 이상 꺼낼 말이 없다.



그날 아침의 일, 아이의 기억을 끄집어낸다. 골목에서 본 사람이 있었던가? 혀 짧은 아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이가 한 남자를 보았다고 한다. 내 귀가 의심스럽고 가슴이 떨린다. 사고가 난 그 아침 그 시간 그 골목에서… 그 현장, 그곳에서… 그를 보았단다. 아니길 바랐다. 아이의 대답에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응, 응” 대답한다.



모질고 독한 엄마는 아이의 말을 녹음해 나간다. VCR로 녹화도 하고 중요한 부분에선 녹음기도 가져다 댔다. 치료하는 아이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아이의 상처는 두 눈을 앗아가기 위해 고개를 뒤로 젖힌 상태에서 약품을 부은 듯, 머리 뒤로 약품이 흘러내린 흔적이 남아 있었다. 담당 과장님은 입안으로 이만큼 약품이 들어갈 수는 없노라 하셨다. 약품이 입에 닿으면 입을 다물게 된다고 하신다. 하지만 아이의 입안은 약품으로 온전히 녹아 있다. 아이는 눈과 입에 집중적으로 약품이 가해진 것 같다. 누군가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약품을 부은 것이다.



왜 눈과 입의 상처가 더 심해야만 했을까? 왜 아이의 눈과 입을….



엄마는 찍고 또 녹음한다. 이 세상에 이보다 더 독한 엄마가 있을까? 세상에 이보다 더한 벌을 받을 수 있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흐른다.



“엄마, 위에서(사고를 당한 곳은 골목 위쪽) 뜨거웠을 때, 억수로 큰 전봇대하고 작은 전봇대 있는 데서….”



그 남자는 언제나 아이의 이야기 속에 있다. 아이는 그가 부었노라고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고나기 직전 그를 보았다 한다. 아이가 본 그는 왜 그곳에 있었을까? 그는 그날 아침 그곳에 간 적이 없다고 한다. 아이는 그날 아침 왜 그곳에서 봤다고 할까? 내 아이가 틀렸을까? 그날의 일을 너무나 상세히 기억하고 얘기하는데….




2000년 12월16일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는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들려주는 자장 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치료에 고통스러워하고 상처에 아파해하면 아이의 귓가에 대고 이 노래를 조용히 부른다. 아이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이내 숨소리가 고르게 되곤 한다.



깨어 있는 시간보다 잠들어 있는 시간이 길어진다. 미동도 없이 잠들어 있는 아일 불러본다. “태완아, 태완아.” 아이가 꼼짝하지 않는다. 혹시나 하는 두려움으로 가볍게 흔드니 아이가 움찔한다. 긴 한숨이 입에서 새어나온다.



매일같이 새로운 음식을 찾는다. 많은 돈도 들지 않는 음식들. 엄마랑 시장갈 때 먹은 만두, 이모가 만들어준 김치부침개, 형아랑 아빠랑 놀러 갈 때 먹은 뼈 있는 고기, 국수, 통닭, 라면, 냉면, 생생우동….



어쩌다 구해오면 아이는 작게 오므려진 입 사이로, 병아리 모이만큼도 못 되는 양에 입맛을 잊은 듯 맛이 없다 한다. 나중에 집에 가서 형아랑 먹는단다. 그날이 언제일까.



아이가 먹고 싶은 건 그 음식일까, 아님 엄마처럼 돌리고 싶은 예전, 그날에 대한 목마른 그리움일까.



갑자기 아이 얼굴이 생각나질 않는다. 아무리 떠올려도 붕대 밑에 감춰진 그 아픈 모습만이 자꾸만 자꾸만…. 아이와 아빠를 두고 미친 듯 집으로 달렸다. 아일 보기 위해. 앨범 속에서 아이 사진을 찾았다. 낯선 아이가 엄말 보고 웃고 있다.



몇 장의 사진을 챙겨 큰애가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에 얼른 집을 나섰다. 큰애 얼굴을 볼 자신이 없다. 뭐라 말해야 하나, 동생에 대해 물으면 대답을 어떻게 하나.




2000년 12월19일


매일 큰애와 통화를 한다.



흐르는 눈물을 삼키고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동생 다 나을 때까지 참고 지내라고 얘길 한다. 울먹이는 목소리는 그 애나 나나 다를 바가 없다. 전화를 끊고 돌아서는데 태완이가 묻는다.



“엄마, 왜 우는데?”



“그냥… 태완이가 아프니까, 엄마가 너무 속상해서 울지.”



“엄마, 울지 마라. 내는 괜찮다.”



아이는 괜찮다고 한다. 혀 짧은 소리로. 우리 형아 보고 싶다고 한다. 엄마가 “데려올까?” 하고 물으니 아이는 대답이 없다. 많이 보고 싶을 거야. 매일 밤 장난치며 놀던 형아인데, 얼마나 보고 싶을까.



아이의 몸이 점점 참혹해져간다. 열이 심하게 오르내리고, 몸 이곳저곳이 쓰리고 아파오나보다. 짜증이 심해져간다. 냉찜질로는 해열이 어려워 해열제를 맞아야 한다. 다른 주사는 링거 관을 통해 하면 되는데, 해열 주사는 엉덩이에 맞아야 한다. 40도가 오르내리는 체온을 내리기 위해 하루에도 두 번씩 해열을 위한 주사를 맞아야 하니.



처음엔 나쁜 아저씨 용서해주라고 하더니 잡아서 혼내주라고 한다. 의젓하고 마음 깊은 아이가 사람에 대한 미움을 갖게 됐나보다. 상처의 고통이 심하게 느껴지나보다. 눈이 쓰리고 따갑다고 운다. 아이가 어떻게 견딜까. 어떻게 견딜까.



“태완아, 울면 눈이 더 따가우니까 울지 마.”



작고 가여운 아이. 우는 것도 마음대로 못하게 한다. 아이가 흐느낀다. 엄마의 마음도 미어진다.



“태완아, 마음 편히 가져. 그럼 좀 나아진단다.”



바보 같은 엄마는 어른에게나 함직한 말을 아이에게 한다. 아이는 맘 편히 가진다는 게 뭔지나 알까.



아이는 엄마와 함께 있기를 원한다. 주사를 맞을 때나 치료할 때, 혈관이 없어 가슴 한쪽에 구멍을 뚫어 약을 투입하던 관이 빠져 마취도 없이 또 다른 구멍을 내야 할 때도…. 4∼5명이 아이의 사지를 붙들고 바늘로 관을 고정시킨다. 조그만 그 몸에서 얼마나 강한 힘이 나오는지 모두들 진땀을 뺀다. 그 일이 끝나면 아이는 기진맥진해 깊은 잠에 빠져든다. 차라리 그때가 아이에겐 행복한 시간이리라.



자면서도 아빠 엄마의 존재를 확인한다. 작은 손을 꼭 잡고. 두려웠으리라.



엄마가 옆에 있은들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걸 그 애는 알까?



“엄마, 그거 아나. 뜨거우니까 옷이 저절로 찢어지더라.”



“태완아, 그거 알겠더나?”



엄마가 철렁 내려앉는 가슴을 안고 묻는다.



“응, 뜨거워서 옷이 조금 찢어졌는데, 집으로 오려고 하니까 점점 더 찢어지더라. 잘 안 보여서 신발 하나 벗겨진 거 들고 밑으로 내려왔다.”



아이는 일순간 뿌옇게 변해버린 눈앞의 세상을 아랑곳 않고 집으로 오기 위해 허우적거리며 골목길을 내려왔나보다. 아이는 황산을 황산인 줄을 모른다. 그저 뜨거운 물로만 생각을 한다. 그 뜨거운 물이 무서운 황산이었다는 걸 안다면….



아이는 몸에 고통이 더해갈수록 형아를 찾는다. 보고 싶은 형아야, 우리 형아야….




2000년 12월23일


비가 온다. 아이가 “엄마, 비가 오시나?” 하고 묻는다. 아이는 왜 비를 오신다고 할까. 누가 그렇게 얘기한 적도 없는데. 아이는 시각이 닫힌 대신 청각은 예민해졌다. 빗소리가 고요하다.



침대에 누여진 아이의 키가 부쩍 커버린 것 같다. 의사들도 “태완이가 많이 큰 것 같아요” 한다.



엄마가 “우리 태완이 그새 많이 커서 집에 있는 옷 하나도 못 입겠네” “발도 많이 커서 운동화도 작겠네” 하면 아이는 “그러면 어떻게 하냐” “다 나아서 집에 갈 때 뭐 입고 가” 하고 걱정한다.



엄마는 “새옷을 사주마”고 한다. 아이는 허리끈을 맬 수 있는 옷을 사달란다. 아이는 새옷을 입어보질 못했다. 형아가 입다 작아진, 물려받은 옷뿐이다. 멋있게 잘 어울리는 양복을 사주고 싶다.



집에 있는 형아 눈치가 보이는지, 우리 형아는 어떻게 하냐고 한다. 엄마는 형아는 3학년 올라갈 때 사줬으니 지금은 태완이 것만 사도 된다고 한다.



아이는 운동화 얘기도 꺼낸다. 엄마는 운동화도 옷도 태완이가 사고 싶은 건 뭐든지 다 사주마고 약속한다. 아이는 골드런 운동화를 갖고 싶다고 한다.



지난해(98) 겨울 태완이는 골드런 로봇이 갖고 싶어 산타할아버지께 소원도 빌었었다. 하지만 산타할아버진 골드런 로봇이 다 팔려서 못 주신다는 내용으로 형아랑 태완이 앞으로 편지를 보내고 대신 그 속에 용돈을 넣어주었었다. 아이는 그때 엄마한테 3천원 주고 장난감 사도 되냐고 묻곤 작은 로봇을 사왔었다. 형제가 많이많이 갖고 싶어했다. 골드런 로봇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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